세상사

[스크랩] 삶의 목표는 심미적가치를 얼마나 구현하는데 있다

SnakeLee 2013. 5. 3. 02:39

김용옥/doholk@munhwa.co.kr



나는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김우중회장이 나와 함께 오페라도 가고 영화도 보고 미식을 탐할 줄 알았더라면 대우가 오늘의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텐데…” 그와 함께 여행을 하다보면 삭막함을 느낀다. 그 찬란한 유럽 예술의 숲속에서도 오로지 비지니스 일에만 열중하고, 일정이 다 끝난 저녁에도 탐미의 시간을 가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급적인한 외도를 사양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이렇게 살다보면 작업의 효율성은 높을지 몰라도 그 삶으로부터 인간이 상실되어갈 수가 있다. 우리는 일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일에만 열중하다 보면 나의 삶으로부터 내가 소외되고 타인이 소외되어 갈수도 있다. 나의 삶이란 논리적 목적성에 의하여만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삶의 생명적 가치는 궁극적으로 심미적 향유에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인간교육의 궁극적 목표도 논리적 지식을 전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심미적 감수성을 제고시키는데 있다. 우리의 경제적 삶의 궁극적 지향처도 돈이 아니요, 이러한 심미적 가치를 얼마나 구현하는가에 있다. 인간사회의 건강도 결국 그 사회의 심미적 표현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문화(文化)라는 것이다.

나는 바쁘게 살기로 말한다면 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지만 나는 항상 여유로운 산책을 즐긴다. 영화도 거의 빼놓지 않고, 중요한 전시회도 놓치지 않는다. 미술전시는 매우 정적인 것 같지만, 때로는 감동적인 오페라를 열편보는 것보다도 더 풍요롭고 더 다이내믹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모마(MOMA)나 메트로(Metropolitan Museum)의 특별전시가 브로드웨이의 수십편의 쇼보다 더 감동적일 때가 많다. 더욱이 남들이 별로 안가는 소조한 전시공간에서 남몰래 명작을 발견할 때의 즐거움이란, 아름다운 소녀의 상기된 붉은 뺨의 느낌보다 더 순결한 감동으로 깊은 가슴에서 치솟아 오른다. 이러한 감동을 나는 최근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조선왕조어필 특별전(2월 10일까지, 전화: 580-1511)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정적인 물체를 동적으로 느끼려면 그 사태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 물체를 탄생시킨 삶의 이야기, 그 삶의 역사적 맥락, 그리고 그러한 맥락으로의 나의 감정의 이입이 요구되는 것이다. 왕 왕(王)이란 무엇인가? 봉건시대의 군주라는 말자체가 어폐가 극심하다. 우리나라역사엔 엄밀한 의미에서 ’봉건제도’가 존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왕이란 무엇인가? 사극에 흔히 비치는 어벙벙한 멍청이, 중전이나 희빈·상궁에게 시달리며 짜증만 내는 놈, 아니면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들 앞에서 벽력같은 소리나 지르는 놈, 정치사의 음모속에서 주연이나 베풀고 사람이나 죽이는 놈, 궁정의 퇴폐적 삶이 싫어 몰래 월장이나 하는 놈 등등의 이미지밖에는 우리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왕의 이미지가 이렇게 우리의 삶이나 그들 자신의 삶의 실상으로부터 유리되어 부동(浮動)하는 까닭은 그 잘난 민중사관이나 민주주의의 허상 때문일 수도 있다.

민중사관이라는 좌파의 진보성이 때로는 케케묵은 식민지사관의 답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일제식민지사관의 주동자들은 조선왕조가 일제에게 굴복해야만 했던 필연성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역대 제왕들의 무능을 어필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야 조선왕조가 얼마나 형편없는 나라였는지를 과시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식민지에서 벗어나 또다시 민주주의에 미친 사람들은 민중을 신(神)으로 모시다 보니까, 과거의 왕(王)을 민중을 탄압하기만 하는 독재와 무지와 악덕의 상징으로 암암리 폄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식민지사관을 탈피한다고 하는 민중사관의 주체가 또다시 식민지사관의 악질적 병폐를 답습하고 만 것이다. 오늘날의 사극이나 영화도 이러한 식민지사관과 민중사관을 적당히 짬뽕해서 빚어놓은 진보를 가장한 픽션에 불과한 것이 허다하다.

왕은 왕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죽은 인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다. 그 살아있는 인간의 삶속에는 당대 민중의 삶이 반영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왕과 민중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왕이 곧 역사요, 문화요, 가치였다. 과거의 왕들은 시세와 유리된 멍청한 무식꾼들이 아니다. 시서화를 달통한 문사(文士)들로부터 매일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의 치열한 학문적 수련을 쌓아가는, 당대 학문과 예술의 최고봉의 수준을 달리는 재사들이었다. 과거의 왕들은 위압적인 폭군들이 아니었다. 지방분권적인 봉건영주제가 아닌 중앙집권적 양반관료귀족주의 체제속의 왕은 삼사(三司)의 공론을 거쳐야만 도덕적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절제된 권력의 초라한 상징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시(詩)·서(書)·화(畵)를 말하지만, 시·화란 결국 서속에 용해될 수 있는 것이요, 한 인간의 교양으로서 가장 일상적이고 근원적인 것은 서(書)일 뿐이었다. 서도야말로 조선조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서도의 변천사야말로 어필(御筆)의 변천을 통하여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조선조 국왕들의 시유(詩諭)나 소비(疏批), 서간이나 발문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감격은 메트로의 찬란한 특별전의 감격보다 몇천배 짙은 핏줄기의 감동이었다. 우리는 ‘한글’하면, 지고한 어전에서는 외면된 ‘언문’이요, 규방에 갇혀버린 ‘암클’이라고만 생각키 쉽다.

세종이후의 모든 국왕들이 한글을 일상생활에서 즐겨 썼다는 것도 또 하나의 감격으로 다가온다. 한글 즉 우리의 정음(正音)은 왕실에서 태어나 왕실에서 숙성되어 왕실에서 완성된 것이다. 역대 국왕중에서 학문의 최고경지에 올랐다고 까지 말할 수 있는 정조(正祖), 양란(兩亂)후 흐트러진 서체를 바른데로 돌린다하여 서체반정(書體反正)을 부르짖은 정조, 근엄단정하고 강경질박한 한석봉체에 안진경(顔眞卿)의 비후장중(肥厚壯重)한 맛을 곁들인 정도(正道)의 주인공 정조, “글씨가 곧 사람”임을 말하며 “글은 성정(性情)의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글씨는 심획(心劃)일 뿐이다”라고 주창하면서 졸박무교(拙樸無巧)한 서체를 고집한 정조, 그렇게하여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子香) 그리고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존중하는, 고담(枯淡)한 필선의 졸박청고(拙樸淸高)한 추사체(秋史體)의 선구를 이룬 정조, 그 정조가 불과 4살때 쓴 한글서한을 보는 감격은 참으로 정겨웁다. 4살짜리 어린아이의 심정(心情)과 문기(文氣), 그리고 그 질박한 서체(書體)속에서 향후 조선말기의 모든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叔母主前. 상풍의 긔후 평안뙶오신 문안 아뗮고져 딒라오며 뵈완 디 오래오니 섭섭그립떙와 뙶뗮다니 어제 봉셔 보뗮고 든든반갑떙와 뙶오며 한아바님겨오셔도 평안뙶오시다 뙶온니 깃브와 뙶뗮듆이다. 元孫.

외가 홍씨(洪氏)에서 자라난 정조가 궁에 돌아와 있으면서 외숙모에게 보낸 편지다. 상풍(霜風)의 긔후(氣候)란 늦가을 절기를 말한 것이요, 여기 “한아바님”이란 외할아버지를 지칭한 것이다. “섭섭그립떙와”와 “든든반갑떙와”라는 대구(對句)도 4살짜리 어린아이의 성숙한 문재(文才)를 보여주는 반면, 앞으로 곧 닥칠 아버지 사도세자 비운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는 듯 가련한 느낌이 서려있기도 하다.

임진왜란시, 의주로 피난하던 어수선한 길목에서 두딸과 아들 하나를 잃어버린 선조(宣祖)가 함경도 관찰사 송언신(宋言愼)에게 보내는 밀찰(密札)도 그 정녕스러운 부정의 표출이 참으로 눈물겨웁다. 신하에게도 그렇게 정중할 수가 없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망망하고 밤낮으로 멍든 회포 풀길이 없소. 다행히 찾아서 잘 보호해준다면 경의 은덕은 장차 보답할 길도 없는 것이외다.”(其存其死, 消息茫茫, 日夜냰懷, 幸宜尋覓保恤, 則卿之恩德, 將無以報矣.)

그리고 마마(痘疾)에 걸린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의 병세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간곡한 마음이 드러나 있는 언간(諺簡)도 있다.

“대강 用藥뙸 이리 이셔도 醫官醫女딁 드려 待令뙶려 뙶노라. 분별말라. 뗵연 아니 됴히뙶랴.”

우리는 선조하면 왜놈들한테 쫓겨 몽진가며 백성들의 원성만 받은 무능하고 불행한 군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시기는 조선왕조의 성리학이념이 절정에 달하여 퇴계 이황, 이이 율곡과 같은 대석학들이 기염을 토하던 시기요, 조선왕조다운 토착적 문화가 만개하여 자신감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서체로 말하면 초기 송설체(宋雪體)의 연미지태(姸媚之態)를 떨쳐버린 성리학적 미감(美感)의 근엄단정하고 강경질박한 석봉체(石奉體)가 정착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한석봉의 서체가 선조의 지도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선조의 어필의 필력이 오히려 한석봉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법주사 소장의 선조어필 초서병풍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그 호쾌하고 장쾌한 지존의 분방한 필력은 보는 이에게 압도적 느낌을 발한다.

담장가의 매화 한가지

추위를 능멸하고 홀로 피었구나

멀리서도 눈송이가 아님을 알겠노라

은은한 향기가 풍기기 때문이지

(墻角一枝梅, 凌寒獨自開.

遙知非是雪, 爲有暗香來.)

엄동설한 전란의 추위를 극복하고 다시 향기를 발하는 국운을 낙관적으로 암시한 것은 아닐까?

조선왕조어필의 대세는 대강 4기로 나뉜다. 전기는 안평대군 이용(李瑢)과 문·성종의 송설체(=조맹부체)로 대변된다. 그리고 양녕(讓寧)의 광초(狂草)는 가히 귀신의 난무(亂舞)라 칭할만 하다. 그리고 중기는 선조와 한석봉의 필치속에서 모든 문화가 조선조 특유의 자신감을 얻어가는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후기는 양란(兩亂)이후 다양화되고 혼탁되어진 서체를 바로 잡아가는 영·정조의 서체와 청조 박학(樸學)의 질박한 기품이 유입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말기는 추사체의 모사인 듯한 느낌을 주는 헌종의 글씨와, 추사에 직접 배운 흥선대원군의 화려하고 발랄한 필묵으로 그 마지막 꽃을 피운 시기이다.

어필전은 우리에게 묻는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과연 어떠한 자질을 지녀야 할 것인가? 조선왕조는 과연 어떻게 그토록 극심한 전란과 사화속에서 오백년의 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단 말인가? 당대의 고등한 문화를 한몸으로 구현할 수 없는 자는 결코 그 나라를 통치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는 끊임없이 마음을 열고 배워야 한다. 통치과정 그 자체가 끊임없는 교육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영·정조의 찬란한 르네상스문화를 연 숙종의 정갈하고 호쾌한 서도속에 담긴 맹호연의 시구로 어필전 소감을 마무리 지어보면 어떨까?

봄잠에 푹빠져 새벽인줄 몰랐더니

곳곳에 새우는 소리

간밤에 비바람 소리 들렸으니

꽃잎이 꽤 떨어졌겠지

(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

이제 지나간 꽃잎 떨쳐버리고 새봄을 맞자구나!
출처 : 무대위의 꼭두각시
글쓴이 : happydance 원글보기
메모 : 김용옥 문화일보 칼럼